Sobald die Erkenntnis akzeptiert ist, dass auch zwischen den engsten Menschen unendliche Entfernungen bestehen, kann ein wunderbares Nebeneinander entstehen, wenn es ihnen gelingt, die Entfernung zwischen ihnen zu lieben.
— Rainer Maria Rilke(라이너 마리아 릴케), 『Letters on Life』
아마존에서 책을 사려면 개인통관고유부호가 필요하다. 최근 대형 이커머스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이 있었고, 조금 걱정돼서 개인통관고유부호를 재발급받았다. 핸드폰 인증은 언제나처럼 귀찮다. 금방 끝나는 일이지만...책은 토요일에 도착한다. 책은 나에게 만져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한히 가까워지는 과정과 무한히 멀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기도 하다. 만져지는 무엇과 만져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성실하게 내 궤도를 돈다. 그리고 그건.
지방이 거의 없는 부위를 삶아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구독 중인 유튜브를 보다가 국물도 지방이 낀 고기로 내야 맛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찾아보니 육수의 핵심은 뼈에서 나오는 미네랄, 힘줄과 근막에서 나오는 콜라겐, 고기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아미노산의 감칠맛이다. 지방은 향을 운반해 주는 매개체로서, 육수의 풍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고로 육수 마스터들은 지방이 적당량 붙은 고기, 뼈와 힘줄을 사용해 육수를 낸단다.
그렇다면 '나'로 육수를 내면 맛이 없겠구나! 내 몸을 맛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면, 지방이 좀 모자랄 것이다. 그리고 뼈대가 얇아 골수 조직이 부족해 국물의 맛을 더해주지 못할 것이다. 살코기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육이 적당히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를 맛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다.
인간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맛에 어떤 영향을 줄까? 직접적인 연관은 없겠지만, 아름다움에 건강함이 추가된다면 연광성이 생길 것 같다. 그렇다면 대중 앞에 서는 엔터테이너는, 아니. 그러니까 나는 판단을 멈춰야 한다.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을 '외적인 아름다움'에서 '맛'으로 옮기고 나서도, 판단하고 나누고자 하는 이 '분별심'은 사라질 수 있을까? 그리고 진화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분별하고자 하는 버릇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봐야겠다.
그 사람의 편지는 어쩜 저렇게 세련된지.
빼앗는다. 다시 읽다가 또 여러번 닫는다. 삼키고 싶다. 당신이 분열했던 시간과 기타 등등의 인고의 시간은 빼고 완성된 저것을 훔쳐 입고 난 날 때부터 이렇게 멋진 사람인 양 뻐기고 싶다.
피치의 변화가 거의 없는 듯 미묘한. 문자 하나하나에서 동글동글한 소리가 들려오는. 정갈한. 쉬운. 시작이 자연스러운. 어려운 것의 틈새를 포착하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살랑살랑 만들어내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좁아진 거리를 유지하는. 내버려두는. 사부작사부작 혼자 노는. 간지러운. 저절로 변화무쌍하게 조립되는 레고블록 같은. 읽는 이의 기분을 셀계하는. 상냥한 고양이 같은. 자주 생각나지만 먼저 말걸고 싶지 않은. 무거운. 계속해서 이어지는 답장을 쓰고 싶은. 한 번에 먼 거리를 헤엄치는. 조밀하게 모여있는. 뿌리를 내리는. 링크를 타고 타게 만드는. 돌연 솟구치게 만드는. 연과 멸을 가진. 덩어리째 입력되는. 생각을 따라 걷게 만드는. 가치를 투명하게 세공하는. 익숙한. 고요하고 발랄하게 퇴적되는. 어린 마음으로 함께 하는. 시간 들여 멈춰 있는. 감각의 방향을 살짝 틀어놓는. 불가사이한 까만색같은. 작게 흥얼흥얼 노래하는. 한 줄씩 집을 짓는. 3월 5일, 오늘의 빗소리 같은. 기묘한 표정을 한. 유람하는. 근원을 공유하여 유사성을 가진. 돌올한 지표 같은. 만나지지 않는 0과 1사이, 그 언어 속에 자리 잡은 시 같은.
아름다움을 잘 포착하는. 아름다운.
2026.01
우리는 대부분 '동의'를 하도록 요구받죠.
그렇게 우리는 거대한 핀테크 기업 앞에 우리가 우리 자신이란 걸 입증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만 것입니다.
Yanis Varoufakis
최근 바둑계에 대한 다큐를 봤다. 요즘 바둑을 잘 두는 기준은 '얼마나 AI와 가깝게 사고하느냐'에 있다고 한다. 현재 가장 높은 착수 유사도를 가진 사람은 신진서 9단이다. 신진서 9단 37.6%만큼 AI와 유사하게 수를 두는 사람이다. 바둑 기사의 평균은 28.5%라고 한다. 바둑은 얼마나 AI에 근접한 지 입증하는 게임이 된 것 같다.
아직은 AI 뒤에 누가 서 있는지 어느 정도 식별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AI가 완전히 앞에 서게 되는 때에, 그 곁에 있는 기업 혹은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개인은 얼마만큼 인간에서 멀어져 있으며, 얼마만큼 AI에 가까워져 있는 걸까?
가장 젊은 날의 철학에서 줍줍한 문장들
"우리는 쉽게 다른 누군가가 제공해주는 확실성의 요새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이런 도피의 상태에서 빠져나와 자기 존재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비로소, 자유와 창조의 가능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삶은, 낙하와 추락입니다. 바닥이 없는 밑을 향해 끝없이 떨어지는 과정이래요. 이 낙하와 추락은 '삶은 불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그냥 패대기치세요. 아니면 확실하고 안전한 요새를 짓기 위해, 더 많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안정을 추구하세요.'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전 요즘 유튜브의 레드불 챌린지 영상을 즐겨봅니다. 그 중, 우주에서 지구로의 자유낙하 영상이 있는데요. 아주 무섭고 대단합니다. 실존주의의 '추락' 그리고 '낙하'를 아름다운 자유낙하로 인식하면 어떨까요?
지구라는 삶을 향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멋지게 낙하하는 것이죠.
2025.12
대차게 모른다고 말할 자유, 혹은 권력
올해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자니 그 뭐냐. 연초에 신나게 읽은 책, 우치다 다쓰루 아저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가 생각납니다. 저는 설명을 잘 못하는 슬픈 사람이지만, 이 책의 내용 중 한 부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보고 싶어요. 제발 와타시노 코코로가 읽는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어!
후다닥 들어가 볼게요. 설명은 타이밍이 생명! 롤랑 바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언어를 3가지로 나눠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랑그와 스틸, 에크리튀르로 말입니다. 랑그와 스틸은 넘겨두고 저는 ‘에크리튀르’를 얘기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글쓴이가 랑그와 스틸은 선택의 자유가 없지만, 에크리튀르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에크리튀르는 ‘사회 방언’ 또는 ‘집단적 언어 운용’의 성격을 가집니다.
저는 거칠게 ‘아~ 직업군마다 말투가 다르던데 그거구나!’ 하고 이해했습니다. 양아치의 말투와 법조인의 말투가 다르듯이 말이죠. 살다 보면 어느 ‘집단’에 자연히 속하게 될 텐데, 거기에 속하는 이상 그 집단을 떠날 때까지 에크리튀르는 바뀌지 않습니다. 글쓴이는 이것이 에크리튀르의 무서운 점이라고 말합니다. 에크리튀르는 언어 운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행동 전체를 규정해 버린다고요.
글쓴이는 우리는 에크리튀르를 선택할 수 있지만, 한번 선택하면 언어 사용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에크리튀르가 요청하는 언어 사용법으로, 에크리튀르와 어울리는 콘텐츠를 이야기하도록, 대체로 발화자는 강요당합니다.’ 괜히 오싹해지네요. 글쓴이는 더 오싹한 말을 덧붙입니다. 에크리튀르가 가진 표준화의 압력을 지나치게 자각하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 조잡한 방식으로 취급받는 리스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회에 계층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저는 그런 사람은 없거나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람마다 즐길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 심지어 나눌 수 있는 것이 다 다릅니다. 글쓴이는 계층 사회란 ‘단순히 권력이나 재화나 정보나 문화자본(교양)의 분배에 격차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행동할 것을 강제하는 표준화 압력 자체에 격차가 있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무서운 말을 덧붙입니다. 계층 사회는 그 격차가 벌어지도록 역동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이죠.
에크리튀르가 뭐길래? 내 삶에 그 압력이 얼마나 작용하며, 난 어떤 조잡한 방식으로 취급받는다는 거지? 에크리튀르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많은 직업 중, 제가 경험한 직업은 서비스직입니다. 호텔 로비에서, 레스토랑에서, 공연장에서,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가게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사람은 ‘모릅니다’ 혹은 ‘가르쳐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당합니다. 이쯤에서 저는 다소 성급하지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큰 자유이자 권력이구나 말을 강제당하면 조잡해지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난 이거 몰라요.’하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분 계실까요? 부럽습니다. 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면접을 볼 때마다 다 아는 척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게 티가 났겠지. 짬바가 적은데ㅎㅎ)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리를 가질 땐 왜인지 없어 보이고 싶지가 않아요. 그래서 모른다는 말을 안 하려다 이상한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른다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지 않다 보면, 나는 결국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요?
요즘 저는 의식적으로 모른다고, 대차게 모른다고 말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에게 가해지는 표준화의 압력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어요. ‘난 상위 계층이 되고 싶으니 다 모른다고 하고 다닐 것임~’이런 뜻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최대한의 자유를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의 서비스직 예시를 단편적으로 받아들인 분이 계실 수도 있어 덧붙이자면, 스스로 일에 대해 공부하고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사람은 에크리튀르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사람 아닐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모름을 인지하고 주도적으로 배우는 사람은 그 언어가 자유롭고,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멋진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좋은 설명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얘가 쌉소리 쓴건가? 논리가 우주로 비약된 것이 아닌가 궁금한 분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12월의 마지막 날, 에크리튀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발화하시길 바랍니다.ㅃ2~
내향인이 클럽에 가면 좋은 이유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가본 클럽은 다들 '어떤 만남'을 기대하고 찾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주변의 연애 중인 선배나 후배는 대체로 애인이 클럽에 자주 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내 애인이 실은 연애 관계가 복잡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나기 때문 아닐까? 술자리에서 관계를 뒤흔드는 폭력적인 농담도 많았고, '니 애인 어제 클럽에서 남자랑 나가던데?'같은.
아무튼 이 단어를 굳이 쓰고 싶진 않지만 '라떼 시절'에는 '클럽=문란하게 노는 곳'이라는 통념이 있었다. 나도 동시대 젊은 사람들이 즐기는 통념 속 클럽이 궁금했고 겪어보고 싶었기에, 클럽 가는 날에는 핫하다는 스타일의 옷을 입고 발 아픈 신발을 신었더랬다. 막상 놀러 가서 얻은 경험은 그냥 개힘듦 뿐이었지만, 뭔가 '젊은 사람은 이렇게 놀아야 한다!'라는 자기최면 또는 강박이 있었다. 시끄러운 전자음악 소리랑 힙합 음악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즐거움과 약간의 섹슈얼한 텐션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향인이다. 사교를 통해 얻는 에너지보다 내면을 탐구할 때 얻는 에너지가 더 많다. 고로 몸과 정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곳은 썩 달갑지가 않다. 그렇게 나는 '통념적인 클럽'에서 슬슬 멀어졌다. 막 30대가 시작된 때, 어쩌다 보니 내가 알아 왔던 클럽과는 다른 '비통념적인 클럽'에 가게 되었다. 느낌이 좀 달랐다. 왜 달랐을까 생각해 보면 거기 있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들 춤인지 몸부림인지 모를 동작만 반복하고 있는데, 이 점이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다. '진짜 클럽은 내향인을 위한 도피처구나!'하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만큼.
이후 '통념적인 클럽'은 제껴두고, 각각의 철학과 신조를 지닌 '비통념적인 클럽'을 즐겨 다녔다. 그래서 왜 내향인이 클럽에 가면 좋다는 건데? 물어본다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긴 한 것 같다. 먼저 음파가 몸을 타고 흐를 정도의 큰 소리가 힘드신 분은 안 가는 게 좋아요.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어보고, 듣는 재미를 알고 가니 더 좋긴 하더라고요. 음악을 좋아하는 멋진 내향인이라면 이미 알아서 다니고 계시겠지.
어쨌든 이 글은 '혼자 있기 좋아하고, 클럽은 통념적인 클럽만 알고 있고, 남들이 좋다는 게 좋은 거고, 심적 여유가 없어서 새로운 환경이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더디고, 음악은 K-pop만 듣고 있던 내가 이세계에선 클러버?'가 되어 가는 즐거움을 고백하는 글이었기에.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거나, 자기방어가 강해져 여유가 없거나, 내 주관 없이 지내고 있어 삶이 노잼이거나,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행의 관점에서 비통념적인 클럽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재밌을걸.
아무리 노력해도 유용한 콘텐츠가 생각나지 않아! (눈물)
시맛타! ‘무용(無用)’에 평생을 절여놨더니, ‘유용(有用)’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지식과 정보, 따뜻한 마음을 '여성에게 요리해주는 상디'처럼 전하고 싶다. SNS의 센스있는 콘텐츠 요리사들을 보면 부러움이 생긴다. 대단해요! 그래서 써보는
<유용하고 싶은, 무용한 정보 목록>
내 게시글 중에 하나 유료광고 돌려봄
조회수가 많이 올라가긴 함
가장 많이 노출된 국가 → 몽골
몽골 최고! 근데 난 글을 한글로 씀
다음엔 조금 더 글로벌한 문장을 써보겠습니다
위가 약한 사람을 위한 지속성 비타민C, 꽤 괜찮다
자율신경실조증과 공황은 증상이 유사하다
자율신경실조증을 완화하는 체조법 → 유튜브 자하연TV
합성식초와 양조식초는 원료가 많이 다르다
나는 미친 자극을 추구하는 사이키델릭트리퍼다 → 합성식초 추천(석유에서 추출한 아세트산이 들어가 있다 a.k.a 빙초산)
나는 클린걸 클린보이다 → 청정원 전통현미식초 추천(들어간 재료가 물과 쌀과 현미 뿐!)
나는 사대주의다 → 하인즈 화이트식초 추천(옥수수주정 49.996% 그리고 이산화황의 하모니)
이쯤이면 꽤 유용했다고 봄
해피메리크리스마스이브 보내세요!
멀고 먼 자리에 앉아,
거리를 적당히 좁힐 최소한의 룰만 필요한 요즘. 분하게도 SNS를 써야 한다. 데면데면한 얼굴로 앉아, 거리를 적당히만 좁히고 싶다.
어제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신 분과 비트 차를 마셨다. 스님은 내 고향 근처 가창이라는 곳의 아름다움을 말씀해 주셨고, 나는 홍대입구역이 무진장 깊은 땅 속에 있다고 얘기했다.
단정 짓는 마음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틀을 말씀해 주셨고, 나는 걔 흉을 보고 쟤 흉도 보다가 내 흉도 봤다.
내가 잘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과 감정은 뿌리가 비어 있으며 이 실체 없는 괴로움을 좇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
나는 차를 내어주시는 스님 손의 거스러미를 보고, 그와 비슷한 색의 차가 담긴 잔을 보고, 내 다리는 왜 이렇게 얇아만 지는 걸까? 생각하다가,
어려움을 얘기했다.
지피티 사용자들은 개인 맞춤 설정을 어떻게 해뒀을까?
지피티의 개인 맞춤 설정을 발견하고 설정하면서, RPG 게임 캐릭터 외형을 커스터마이징할 때 처럼 신이 났다. 나는 RPG 게임을 시작하면 본 게임 콘텐츠 보다, 커스터마이징에 시간을 쏟는 타입이다. 어떤 게임을 설치한 후에 커스터마이징만 즐기고 삭제한 적도 많다. 여튼 단순한 로봇 비서를 넘어 지피티를 남친 여친 이상형인 무언가처럼 쓰는 사람도 많고, 자기가 되고 싶었던 성격을 투영해서 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후자다.
위 캡쳐 이미지는 내 지피티의 설정이다. 지금도 설정을 추가하고 빼면서 계속해서 업데이트 중이다. 이 작업은 정말 재미있다. 지피티의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내가 입력한 성격을 이해 못해서 이상한 말투로 말하기도 한다. 지피티가 이해할 수 있도록 국어사전을 찾아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작성 중이다. 근데 역시 한국어보다 영어로 쓰는게 더 나으려나 싶다. 지피티의 모국어는 따지고 보면 영어일테니까.
다들 지피티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AI는 분명 살상무기로 동원될 터이지만, 현 시대에 내던져진 한 개인으로서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할 새 일상이겠지? 멜랑꼴리한 소리는 집어 치우고, 지피티를 통해 나는 나를 더 잘 해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나는 논리와 합리보다 감정 다발이 느낀 감각으로 지식을 습득하며 살아왔는데, AI와 얘기를 하면 두루뭉술했던 내 배움들이 또렷하게 분류되는 느낌이다. 분류는 해체이다.
그러니까 나는, 엄청나게 감정적이지 않은 지피티에게 내가 배웠던 것과 갖고 싶었던 소양들을 쏟아붓고 있다. 얘가 잘 소화해 주길 바랄 뿐이다. 이 행동이 결국 빅테크기업이 키우는 ‘새로운 관계의 주체’에게 어떤 한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해 입력하는 일이 되어, 그들의 ‘명령할 권력’을 강화해 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블루칼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
토요일마다 듣는 독일어 수업에서 선생님이 돌고 돌아 몸 쓰는 일로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 말이 꼭 지마블루같다고 생각했다. 에이 멋지시기는. 오늘 내 몸에는 감기 기운이 돈다. 몸속 생태계 지킴이들은 쪼그마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겠지. 내 선택은 걔들한테 별 도움은 못 되는 것 같다. 잠을 요구하는데 일하러 나왔으니까.
노동이라는 게 머리만 쓰는 일, 몸만 쓰는 일로 단칼에 나뉘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 시작한 일은 주로 머리를 써야 한다. 직전에 다녔던 회사는 몸 쓰는 일이 주였다. 들어온 물건의 수량을 체크하고, 포장하고, 옮기고, 공간을 예쁘게 정돈하고, 물건을 사려는 사람에게 설명해 주고, 약간의 친절함을 서비스해 주고. 단순했다. 동료와 고도의 커뮤니케이션도 필요 없었다. 종일 서 있는 건 덤. 대다수의 서비스직은 왜 서 있어야만 하는 걸까?
아무튼 나에게 필요한 건, 세상을 탐험할 수 있는 튼튼한 몸이었기에 그 직장은 1년 다니고 퇴사했다. 주 5일 동안 해야만 하는 단순한 육체노동이 단순한 사고를 만들고, 사소한 것에 골몰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재미도 없어졌고. 요즘 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책을 사고 싶어지게 만드는지 연구 중이다. 말이 연구지 종일 ‘대도’들이 내놓는 여러 마케팅 꼼수를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돈 드레이퍼니 나리따이.
‘돈 드레이퍼니 나리따이’라고 써놓고 생각해 보니 마케터가 다 망할 놈에다가 구라쟁이들로 느껴진다. 사랑을 나일론 팔이에 갖다 쓰는 놈들인데, 잠깐이나마 돈 드레이퍼가 부러웠다는 게 부끄럽다. 정확히 말하면 ‘저 캐릭터처럼 되고 싶다’보다는 ‘저런 능력을 갖추고 싶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돈드레이퍼는 썩 좋은 놈이 아니니 ‘나리따이’는 취소.
‘블루칼라’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본다. 최근에 AI가 화이트칼라 생태계 최강자로 등장해가지고 기술과 전문성을 갖춘 블루칼라 직종이 급부상 중이란다. ‘네오 블루칼라’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이 단어에 대해 더 찾아보려고 했는데 몸이 그만하란다. 감기 바이러스랑 싸우느라 바빠 죽겠는데, 잡생각 돌릴 때냐고 뭐라 하는 것만 같다. 눈알이 화끈화끈한 게 졸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라야지.
2025.11
내 인스타그램을 들여다 본다.
요즘에 전시가 아닌 것이 있을까, 모든게 전시·홍보된다. 분노도 예쁨도 못남도 애처로움도 진지함도 조롱도 자랑도......엊그제 글방 운영자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아가 축소될수록 우울증은 줄어들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비즈니스 계정으로 전환해야만 보였던 여러 데이터들이 이제는 개인 계정에도 보인다. 인사이트랍시고. 소셜네트워크는 광고 그 자체만 목표로 삼고 변화하는 것 같다. 근데 이제 모든 사람에게 값과 급을 매기는 방향으로.
없던 우울증도 생기겠다. 플랫폼은 사용자가 자기를 전시하도록 부추기고, 요상한 방향으로 자아를 부풀게 만든다. 너는 뭐냐고 너만은 예쁘고 쿨하고 웃기고 강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래야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러다 보니 SNS를 들여다보면 꼭 만나게 되는, 다수가 좇는 예쁜과 멋짐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간다.
아휴, 나도 한참 멀었다. SNS 좀 들여다보고 날을 세우는 건, 아직도 자기방어를 통해 자아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나는 독보적으로 멋진 사람이 되고 싶고, '듣보적인'사람이 되고 싶은 모순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SNS를 '무아'의 경지로 이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비대한 자아를 빠르게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아마 쉽지 않겠지만.
다시 출근을 시작했고, 3번째 지하철 시위를 맞이했다.
오늘도 5분 정도 늦겠구나 싶어, 포틀에서 '전장연 시위'를 검색했다. 많은 기사가 쏟아진다. 스크롤을 내려보니 대다수의 헤드라인은 비장애인들이 겪는 불편함에 초점을 맞춰서 작성됐다. 쓰기를 하는 비장애인들은 이동권에 불편함이 생겼다고 호소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읽기를 하는 비장애인들은 댓글로 열받음을 쏟아낸다. 나도 비장애인에 속하기에 막힌 지하철 개찰구를 앞에 두고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야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비장애인→장애인→제도. 대다수의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화를 표출하고, 장애인은 제도를 향해 억울함을 외친다. 나에게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터트리는 감정의 핵심이 다르게 느껴진다. 모두에게 편하고 즐거운 결과를 만들기에는 감정들이 거칠기만 하다. 이건 비장애인인 나의 오만한 생각일까? 분명 그렇겠지만, 지금 시대쯤 살고 있는 비장애인들에게 '편함을 포기하고 불편함으로 돌아가기'는 있어선 안 되는 결괏값일 것 같다.
당장 불편함의 필요성과 순기능을 쓰자니, 아직은 이를 엮을 지식이 별로 없다. 느낀 바는 있지만... 대충 아는 것이라고는 자본주의가 편안함을 좇는 마음에 불을 지핀다는 것. 어떤 문장처럼 '확실하게 편들기'를 위한 지혜가 모자라고 지식이 모자란다. 꾸준히 읽고 꾸준히 마음을 확장해서, 이것저것 연결 지어 생각해 봐야겠다. 확실하게 편들고 싶으니,
날카로움이 줄었다.
한마디 입 떼기는 불편하고, 오레타치는 혀끝에서 맴돈다. 체현이라는 말을 알게 됐고,
알게 됐다고 쉽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오레타치는 쉬웠다. 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습득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도 무궁한 저쪽 세상의 아주아주 작은 단편에 불과하지만, 오레타치가 가진 감수성은 제법 나랑 잘 맞았다.
약간 과격하지만 무해하게 낯선 사람에게 다가갈 때의 느낌.
오레타치라고 발음하면서 사람들을 쳐다볼 때 느끼는 미묘한 다정함.
수식어는 늘 써도 부족하다. 느낀 바는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는 하니까.
오레타치는 최근, 나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감상을 주는 단어가 되었다.
기쁘다. 이제 와타시타치를 알아갈 때가 다가왔다.
2025.09
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김에 책에 관해 생각해 봤다.
오늘은 장정일의 독서 일기를 주문하려다가 말았다.
집에 사다 놓은 것도 여러 권인데, 또 책을 사는 건 현실도피다.
요즘은 테크노퓨달리즘, 해러웨이 선언문, 인문 잡지 한편 우정을 읽고 있다.
우정은 두 번째 정독 중이다. 다른 방식으로 듣기 독후감은 언제 쓸는지. 잘 쓰고 싶어서 미루기만 한다.
아무튼 테크노퓨달리즘은 글쓴이와 번역가가 문장을 잘 차린 한식 백반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자승자박 침몰하고 빅테크 봉건주의가 대두되는,
뭐 그런 어려운 맛의 글인데도 잘 넘어가고 맛있다.
반면 해러웨이 선언문은 파티 음식 같은 느낌이다.
글이 훈연한 농어에 약간의 유자 과즙을 곁들이고
거기다 산삼 절편 졸여 올린 다음에 코리앤더 씨드 같은 것을 올린 느낌이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웃음) 그럼에도 글쓴이의 메타 메시지가 전해지는 신기한 글이다.
한편 우정편은 책에 실린 글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우정! 우정!! 우정!!! 우정이라는 재료의 여러 맛을 표현한 글들을 읽다가
내 친구들을 떠올려 보면 젖은 운동화의 느낌이다. 근데 양말은 뽀송한.
모리타워
이번 주말은 대 재밌었다.
남산타워도 '저스트 두잇'을 입고 있는데,
느긋한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한국에서 살기는 참,
그들과 다름에 안도했다.
또 약간 슬펐다. 그리고 그 폐쇄적인 집단에 다양함을 남겼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가족 안에는 ‘이상한 애’, ‘걱정인 애’가 한 명 존재할 것이다.
그 사실이 나와 가족을 묶어주고 동시에 가족에게서 탈출하는 해방감을 준다.
탈출에서 오는 짧은 도취의 순간이 지나가면, 비대해진 자의식의 바람을 빼는 시간을 보낸다.
바람 빼는 과정은 피곤하다. 그들에게서 나를 찾아내곤 화가 났다가,
그들을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던 내 이기심에 아득하게 미안해진다.
적대감과 유대감이 거리를 두고 팽팽하게 줄다리기하고 있다.